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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학과장 칼럼>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 - Bauhaus > (월간 전시가이드 )

  • 시각영상디자인학과
  • 조회 : 954
  • 등록일 : 2023-05-28
신희경칼럼 월간 전시가이드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 bauhaus.pdf ( 983 kb)

잡지에 게재하였던 디자인 엣세이, 칼럼을 업데이트 하겠으며, 새로운 엣세이도 올리겠습니다. 





월간 전시가이드   고정 칼럼 - 신희경 칼럼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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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100주년


디자인의 주요 근대화 프로젝트 중 하나였던 바우하우스가 올해 2019년 4월 1일에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기리는 작업 및 전시가 전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디자인 교육의 틀을 완성한 바우하우스 교육성과는 100년이 지난 현재에도 전 세계 초등학교에서 전문 교육기관에 이르기까지 조형교육 전반에 영향을 주었다. 바우하우스는 처음 설립할 때의 이념은 하나였다. 하지만 활동하면서 수많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전개 양상이 단순하지 않고 다양 했으며 복잡한 면을 지녀 때로는 상반된 성격을 동시에 지녔으므로 이미지로서 하나의 통일체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차츰 명확해졌다. 바우하우스란 다수의 개인 집단이며 조직이다. 더구나 이를 구성하는 다수의 사람은 각각 강렬한 개성의 소유자였기에, 전체로서 다양한 면을 지니는 것은 당연했다. 


1919년 4월에 바우하우스 개교 선언문과 강령을 기록한 4페이지 팜플렛이 발표되었다. 리오넬 파이닝거의 목판화에 이어지는 그 유명한 2 페이지의 선언문에서 그로피우스는 모든 조형 활동의 최종목표는 건축이라 선언한다. 이 선언문은 패전과 혁명의 혼돈 속에서 <정신적인 힘의 중심지, 건축>의 출현을 기대하여, 그러한 <새로운 건축예술의 날개 밑에 제 예술을 결집>할 필요성 을 호소한 베를린의 예술노동평의회 사상의 반영이다. 그로피우스는 또한, 손 공작이 창조적인 조형의 근원임을 강조하여, 예술가는 수공장인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장인과 예술가의 사이에 존대한 벽을 만들려는 듯한, 계급차별적인 사고를 지니지 말고, 수공장인의 새로운 길드를 만들자!, 우리들은 함께, 건축과 조각과 회화의 모두가 하나의 통일성 있는 형태가 되는 듯한,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바라고, 생각해내고, 그리고 만들어 내자>고 호소한다. 이때 잇텐은 바우하우스를 떠나고, 대신 예비과정은 모호 이너지, 요셉 앨버스에 의해 진행되게 되고, 그와 동시에 구성주의적 경향으로 변모하였다. 초기의 낭만주의적 경향은 1923년 이를 계기로서 바우하우스의 교육방향도 서서히 명확해지게 되어, 그해에 개최된 제1회 바우하우스전의 그 로피우스 강연 제목 <예술과 기술 –테크놀로지- 새로운 통일>처럼, 멀리 공예 의 개혁 운동 안에서 취급된 <예술과 산업>이라는 커다란 테마를 <예술과 수 공업>에서 <예술과 공업>으로 한정하게 되었다. 그로피우스는 진정한 손공작의 재생이 필요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공업생산의 중요성을 설하여, 공업제품에서 새로운 독자적 형태를 창조해가는 것의 가능성을 시위하였다. 그 리고 바우하우스 책무는 <자신들이 생활하고 있는 사회의 근본적 성격을 확실히 인식할 수가 있고, 그러한 인식을 상상력과 연결지음으로서, 사회를 상 징하는 전형적인 형태를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을 육성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비현실적인 로맨티시즘의 섬>으로 도피하는 것을 피하였다. 


이 당시 그로피우스가 바우하우스의 교육관을 시각화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의 이념과 구조〉[그림 1] 구성도(1923)이다. 이는 예비과정, 공방과정, 건축의 순으로 중앙을 향하여 수렴되는 교육구성도(체계도)이다. 한편 [그림 2]는 1922년에 클레가 최종 목표에 건축 외에 무대공방 을 포함하여 작성한 교육구성도이며, [그림 3]은 클레가 1928년에 그린 바우 하우스의 교육구성도이다. 그로피우스는 무대공방을 직접적으로 교육모형도에서 표기하지 않았으나, 무대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동경이 반영된 비일상적 세계, 바꿔말해 일상생활을 재생하기 위한 축제 공간으로 생각하여, 무대예술에서 건축과도 같은 오케스트라와 같은 일체감을 보고 있었다. 그로피우스는 데사우 학교 건물 설계에서 이 이념을 정확하게 형상화 하였는데, 즉 무대 뒤의 막을 올리면 그 뒤는 일상 세계인 학생 식당으로 연결된다. 마지막 교육 구성도는 이러한 그로피우스의 데사우 학교 건물 설계를 시각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맨 아래의 원이 건축이고 맨 위의 원이 '무대 (스테이지)'이며 그 사이의 중심 사각형이 기초과정이다. 생활을 형성하는 건축과 그에 관련되어 평상시 에 마주하는 조형물과 커뮤니케이션 영역의 광고는 일상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며 일상의 세속적 세계이다. 이에 비해 ‘스테이지’는 가장 위에 있기에 비일상적인 성스러운 곳 즉 축제의 세계에 자리 잡고 있다. 건축 공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일상적 삶의 세계라면, 무대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동경, 즉 일상생활을 재생하기 위한 축제 공간이라는 비일상성을 상징하는 곳이다. 이 둘 모두가 모든 예술의 종합, 전체성을 상징한다. 이처럼 데사우 이후의 바우하우스 교육 방법론은 어떤 면에서는 분명히 공업 생산과 연결되어 구체적인 디자인 개발을 뒷받침하는 조형상의 실험적, 발전적인 원천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원리와 제작을 파괴해가는 경계 초월성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특히 기초교육은 그로피우스가 데사우기에 의도한 대로 사회의 산업화라는 일상성 세계에 대한 공헌, 즉 디자인 전공 교육의 초급 입문 과정만을 지향한 것은 아니며 이를 되돌아보고 반추하는 기능도 있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참여한 디자이너나 건축가, 화가 들이 이런 전체성, 다양성을 전제하고 지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활동은 전위적 조형 운동, 새로운 교육 활동 등 다면적인 결과를 낳았다. 또한 바이마르에서 데사우로 이동했으며 마지막은 베를린에서 끝나는 등 그 성격도 매우 변동적이었으며 자유도와 허용도가 큰 교육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유도와 허용도를 지닌 바우하우스는 단지 그로피우스의 강령인 ‘예술과 기술과의 통일’로 상징되는 합리 성과 기능성만을 우선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다양한 개성 집단이었고 제작 공동체였던 것이다. 그로피우스 자신도 1968년 9월 20일 런던 강연에서 바우 하우스를 단지 실리주의적인 디자인 방법을 가르치는 학교로 보는 것은 오해이고 그곳에서 교사들은 협력하면서 모든 조형에 객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각적 조형언어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으며, 다양한 의견의 서로 다름을 잇는 연결고리는 ‘조형철학’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 디자인을 둘러싼 사 회적, 경제적 상황은 바우하우스의 시대와는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100년이 지난 오래된 디자인학교의 기초교육 모델이, 이역만리 한국에서도 하나의 고 정된 규칙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앞서 살펴본 전체성, 양의성, 횡단성, 연계성의 힘과 ‘조형철학’을 추구하는 자세가 끊임없이 생명력을 부여 해왔고, 우리는 미처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으나, 은연중에 그 혜택을 누려 왔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신희경

 

  • 담당부서 : 시각영상디자인학과
  • 담당자 : 신희경
  • 연락처 : 043-649-1647
  • 최종수정일 : 2024-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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