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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저리 이야기
여하튼 그냥 썼다
- 박정헌
- 조회 : 2597
- 등록일 : 2012-09-24
재미있는 글이나 한 편 써볼까 하다가 금세 단념했다. 펜만 잡으면 진지해지는 버릇은 평생 안고 가야 할 부채처럼 느껴진다. 평소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성격도 여기 한몫 할 테다. 겉으로 다함께 웃기보다는 속으로 남몰래 우는 시간이 부쩍 늘어난 요즘 내 기분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세저리 뉴스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고도 일부러 쓰지 않고 미뤄두었다. 어리고 어수룩한 속내가 글에 묻어날까 두려워서다. 텍스트보다는 사진이 많이 쓰이는 게시판의 성격도 내 망설임에 부채질을 했다. 이미지가 낱말과 문장을 대체한 자리에 끝까지 활자를 고집하는 일은 다소 고지식해 보인다.
그러다 문득 지난 2년 동안 나 자신을 위한 글은 단 한 편도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쓴 글은 모두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거나 누군가를 위한 글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호소와 그런 나를 당신이 인정해주길 바란다는 애원을 뒤섞으면서. 머리 속 한줌 지식을 부풀리고 포장하면서. 글을 쓸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변호사이자 가장 무능력한 검사이고 동시에 가장 너그러운 판사가 된다. 글쓰기의 법정에 피고이자 원고로 불려간 내 자의식은 세상에서 조금씩 증발하는 기분이다. 누군가가 손에 거울이라도 쥐어준다면 그걸 들여다보고 ‘정신차려!’라고 되뇔 수 있으련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쓸 수밖에.
요즘 들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생각하기보다 책이나 신문을 들여다보고 쓸만한 정보를 우걱우걱 삼키는 경우가 많아서다. 그러다 지치면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거지. 멍하니 있다 보면 머릿속에 우겨 넣은 내용 대부분을 잊어버린다. 초조한 마음에 잊어버린 정보에 새로운 것까지 더해 다시 머릿속에 집어 넣는다. 그리고는 백지장이라도 된 것마냥 다시 잊어버린다. 시시포스더러 미련하다고 욕할 깜냥이 아니다. 닮아도 어떻게 신의 가장 못난 부분만 골라 닮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시간을 공기마냥 흥청망청 써버리는 와중에도 세상은 알아서 제 갈길 찾아간다. 학교에서 축제가 있었다. 별다른 관심이 없어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2ne1과 윤하를 포함해 가수 몇 명이 왔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2ne1 멤버인 씨엘의 무대매너가 어지간히도 인상적이었나 보다. 씨엘은 카메라에 비치는 모습과 실제 성격이 가장 다른 연예인 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씨엘과 사석에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의 씨엘은 나한테 지나가게 자리 좀 비켜달라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낯가림 심한 아이였다. 연예인이 직업이라는데 낯가림이 심해 나도 적잖이 당황한 기억이 있다. 소속사의 이런저런 규제로 스트레스 또한 적잖이 받는 것처럼 보였다. 미디어가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우리 인생은 결국 연극이다.
주말에는 이중섭 특강이 있었다. 이중섭의 다른 그림도 훌륭했지만 특히 <자화상>에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자기가 제정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이중섭이 정신적으로 온건치 않았음을 역설한다. 그러니 <자화상>은 그의 정신적 불안이 꼼꼼하게 기록된 진단서처럼 보인다. 이중섭은 위대한 화가였지만 좋은 가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종종 그런 예술가가 있다. 뛰어난 예술가인 동시에 무기력한 가장인 사람들. 시인 이상이 그랬고, 영화감독 이만희가 그랬다. 이들의 작품은 오늘 우리가 ‘교양’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평생을 바친 작품을 또 다른 누군가는 지적 장신구로 소비한다. 이게 예술을 대하는 옳은 방식인지 나는 모르겠다.
글이 길어졌다. 원래 이 글의 목적은 ‘시 소개’였다. 나에게 왜 시를 소개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약속을 했으니 간단하게나마 시 얘기를 덧붙인다. 제목은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작가는 이바라기 노리코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 주는 것을 게을리하고선
나날이 까다로워져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초해져오는 것을
근친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엇이든 서툴렀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초심이 사라져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당초 유약한 결심이 아니었던가
잘못된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을 발하는 존엄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보 같으니라고
해설은 신형철이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게 해냈다. 나는 주석이나 다는 것으로 족하다.
시인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문학은 문학 이상의 역할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시인은 역사의 스승이자 사상의 어른인 시기였다. 문학이 아직은 정치와 결별하지 않았을 때, 시인은 함께 울먹이기보다 단호하게 명령한다. 그게 집안 어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야속하게도 이 시는 감수성을 지키는 방법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뿐이다. 그러니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방식은 각자에게 떠넘긴 셈이다. 정당한 동시에 무책임한 명령이다. 실은 시인도 어떻게 감수성을 지켜야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모른다고 포기할 순 없다. 그건 어른의 역할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아주고 나아가야 할 길을 터주는 게 집안 어른이 아니던가. 그러니 명령할 수밖에. 명령은 단순하기에 처절한 법이다. 세상은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다. 견뎌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시인은 처절하게 명령한다. 시인의 명령을 받은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견뎌낸다. 때로는 게으르게, 때로는 서투르게, 때로는 초조하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근심 하나로 굴러가는 사랑처럼. 바보 같으니라고.
그러다 문득 지난 2년 동안 나 자신을 위한 글은 단 한 편도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쓴 글은 모두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거나 누군가를 위한 글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호소와 그런 나를 당신이 인정해주길 바란다는 애원을 뒤섞으면서. 머리 속 한줌 지식을 부풀리고 포장하면서. 글을 쓸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교활한 변호사이자 가장 무능력한 검사이고 동시에 가장 너그러운 판사가 된다. 글쓰기의 법정에 피고이자 원고로 불려간 내 자의식은 세상에서 조금씩 증발하는 기분이다. 누군가가 손에 거울이라도 쥐어준다면 그걸 들여다보고 ‘정신차려!’라고 되뇔 수 있으련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쓸 수밖에.
요즘 들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생각하기보다 책이나 신문을 들여다보고 쓸만한 정보를 우걱우걱 삼키는 경우가 많아서다. 그러다 지치면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거지. 멍하니 있다 보면 머릿속에 우겨 넣은 내용 대부분을 잊어버린다. 초조한 마음에 잊어버린 정보에 새로운 것까지 더해 다시 머릿속에 집어 넣는다. 그리고는 백지장이라도 된 것마냥 다시 잊어버린다. 시시포스더러 미련하다고 욕할 깜냥이 아니다. 닮아도 어떻게 신의 가장 못난 부분만 골라 닮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시간을 공기마냥 흥청망청 써버리는 와중에도 세상은 알아서 제 갈길 찾아간다. 학교에서 축제가 있었다. 별다른 관심이 없어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2ne1과 윤하를 포함해 가수 몇 명이 왔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2ne1 멤버인 씨엘의 무대매너가 어지간히도 인상적이었나 보다. 씨엘은 카메라에 비치는 모습과 실제 성격이 가장 다른 연예인 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예전에 씨엘과 사석에서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의 씨엘은 나한테 지나가게 자리 좀 비켜달라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낯가림 심한 아이였다. 연예인이 직업이라는데 낯가림이 심해 나도 적잖이 당황한 기억이 있다. 소속사의 이런저런 규제로 스트레스 또한 적잖이 받는 것처럼 보였다. 미디어가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우리 인생은 결국 연극이다.
주말에는 이중섭 특강이 있었다. 이중섭의 다른 그림도 훌륭했지만 특히 <자화상>에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자기가 제정신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이중섭이 정신적으로 온건치 않았음을 역설한다. 그러니 <자화상>은 그의 정신적 불안이 꼼꼼하게 기록된 진단서처럼 보인다. 이중섭은 위대한 화가였지만 좋은 가장은 아니었던 것 같다. 종종 그런 예술가가 있다. 뛰어난 예술가인 동시에 무기력한 가장인 사람들. 시인 이상이 그랬고, 영화감독 이만희가 그랬다. 이들의 작품은 오늘 우리가 ‘교양’으로 소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평생을 바친 작품을 또 다른 누군가는 지적 장신구로 소비한다. 이게 예술을 대하는 옳은 방식인지 나는 모르겠다.
글이 길어졌다. 원래 이 글의 목적은 ‘시 소개’였다. 나에게 왜 시를 소개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약속을 했으니 간단하게나마 시 얘기를 덧붙인다. 제목은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작가는 이바라기 노리코다.
바싹바싹 말라가는 마음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라
스스로 물 주는 것을 게을리하고선
나날이 까다로워져가는 것을
친구 탓으로 돌리지 마라
유연함을 잃은 것은 어느 쪽인가
초초해져오는 것을
근친 탓으로 돌리지 마라
무엇이든 서툴렀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었던가
초심이 사라져가는 것을
생활 탓으로 돌리지 마라
애당초 유약한 결심이 아니었던가
잘못된 일체를
시대 탓으로 돌리지 마라
가까스로 빛을 발하는 존엄의 포기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
자신이 지켜라
바보 같으니라고
해설은 신형철이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하게 해냈다. 나는 주석이나 다는 것으로 족하다.
시인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활동했다. 당시 문학은 문학 이상의 역할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시인은 역사의 스승이자 사상의 어른인 시기였다. 문학이 아직은 정치와 결별하지 않았을 때, 시인은 함께 울먹이기보다 단호하게 명령한다. 그게 집안 어른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야속하게도 이 시는 감수성을 지키는 방법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저 명령할 뿐이다. 그러니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방식은 각자에게 떠넘긴 셈이다. 정당한 동시에 무책임한 명령이다. 실은 시인도 어떻게 감수성을 지켜야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모른다고 포기할 순 없다. 그건 어른의 역할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아주고 나아가야 할 길을 터주는 게 집안 어른이 아니던가. 그러니 명령할 수밖에. 명령은 단순하기에 처절한 법이다. 세상은 살아가는 공간이 아니다. 견뎌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시인은 처절하게 명령한다. 시인의 명령을 받은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견뎌낸다. 때로는 게으르게, 때로는 서투르게, 때로는 초조하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근심 하나로 굴러가는 사랑처럼. 바보 같으니라고.